Home > 커뮤니티 > 무진칼럼

무진칼럼

관용

  • 조창희  (cho3029)
  • 2025-06-05 07:01:53
  • hit496
  • vote2
  • 220.85.248.36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를 필요로 합니다. 매슬로우는 이를 단계별 욕구로 정리했지요. 인간의 속성을 살펴 기본적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들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안전의 욕구부터 최상위 단계의 자아 실현까지 꽤나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차원의 현실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존재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다는 성취 지향의 이론은 그 후 많은 인용이 되어왔으며, 개인과 사회를 통해 상당 부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욕구의 바탕이 되는 어떤 본질적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바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관용입니다. 지금까지 이 세계는 거대한 두 번의 전쟁을 겪었지만 그 사이에도 크고 작은 국지전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는 다른 어느 곳에선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처럼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트럼프의 재등장 이후 세상은 관세 전쟁으로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마치 2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국수주의의 망령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간 힘의 대결 양상이라 섣불리 어리석은 결정을 할 것이라는 우려는 비교적 약하지만, 경제적 현실과 감정과 선동에 바탕을 둔 패권 대립이라는 불똥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역사에서 그 많은 고통과 희생을 겪고서도 또 다시 비극을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이 한두 번이었습니까만, 도대체 왜 지난 날의 교훈을 망각하는 것일까요? 지구라는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탐내고 그러다가 상호 파괴에 이르는 것이 과연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뜻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라는 종족의 속성이 그런 무법성을 내재하고 있어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거창하게 국가를 들먹이지 않고, 한 가정만 보더라도 인간의 사악한 성질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2차 대전 후 일본 신문에 연재된 역사 소설 <대망>은 국가와 개인의 영고성쇠에 대해 많은 깨우침을 줍니다. 100년이나 넘게 지속된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막부를 세워 평화 시대에 접어들기까지 중세 일본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우리 역사와 비교해 보면 참으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두고 오다 노부나가는 죽여버린다고 하고,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울게 만들겠다고 했지만,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야기는 그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멸망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보면서 神佛의 사상에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킵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사망한 나이를 넘어서자, 쇼군직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은퇴한 채 오로지 일본의 평화를 위한 정책을 펼침으로써 평화가 정착되도록 노력합니다.

 

칼의 법칙에서 평화로운 세상으로의 전환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무한한 인내와 자아 각성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에야스는 국제정세에 대한 관심과 통치이념 정립을 위한 도학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성찰의 더욱 깊은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사회의 기반을 다지려고 합니다. 그 바탕에는 포용, 모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장시키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작가는 계속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겉보기와는 달리 점점 각박해지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갈라질 대로 갈라져 극한 대립을 보이는 정치와 그에 선동되는 군중들, 서울의 1인 가구가 40%에 달한다는 사실, 여혐, 남혐, 세대 갈등 등 온갖 분열의 망령이 날뛰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그랬으며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해외 여행을 하거나 일정 기간 유럽의 독일이나 프랑스에 거주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읽어보면 한국은 정말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헬조선이라며 청년들을 부추긴 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출산율을 걱정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모든 문제의 한 근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지나친 애정은 결국 자식의 미래를 망칠 뿐만 아니라 부모도 불행의 나락으로 밀어 넣을 수 있습니다. 남의 자식도 자기 자식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소설에서 이에야스는 자신의 죽음 이후 일본 사회의 혼란을 걱정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늘이 볼 때는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똑같이 귀여운 거야. 이 점에 사물의 표리와 깨달음이 있어. 사람은 본디 일체-어리석은 자, 천한 자일지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그러면서 인간세상이란 늘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 승리와 패배와 행운과 불운이 섞인 윤회의 세계라고 합니다.

 

관용. 자신이 소중한 것을 아끼는 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 역지사지의 인지상정에만 충실한다면 다툼, 갈등, 전쟁 대신 창백한 한 점 위에서의 생명체들로서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조 창 희

 
게시글 공유 URL복사
댓글[0]

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