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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칼럼

나이가 주는 선물

  • 조창희  (cho3029)
  • 2025-12-05 08:4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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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문한 식당에서 반찬으로 제공된 봄동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봄동은 주로 겨울을 지난 끝자락이나 이른 봄에 먹는 채소였습니다. 한겨울의 추위를 버텨내며 담긴 영양분은 고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른겨울에 먹을 수 있다니. 세상 좋아진 걸 새삼 느낍니다. “보리는 입동 전에 묻어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가을에 씨를 뿌려 겨우내 땅속에서 추위를 견디며 충분한 성숙기를 거친 보리는 양기운이 넘쳐나는 여름철 음기운을 보충해 주는 좋은 음식이라고 합니다.

 

삶의 변화도 그러할까요? 충실하게 한평생 살아온 후 노인으로 불리는 단계에 이르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직장에서 은퇴하면서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변화입니다. 냉정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요! 그럼에도 꿋꿋이 버텨온 용기는 가상합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궁여지책이기도 했겠으나, 동기를 북돋는 여러 문화적 장치들에 힘입어 운명의 터널을 걸어온 점만으로도 스스로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의 종착점을 생각한다면 역시 균형이 중요합니다. 메멘토 모리!

 

한 번뿐인 삶을 장엄하게 살기 위해 준비하고 시도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며, 어떤 위대한 인물도 일상의 평범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삶에 필요한 자잘한 일에 충실하는 한편 포용력을 넓히기 위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행군하던 중 이런 묘비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길손이여, 그대가 누구든, 또 어디서 왔든-나는 그대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노라-나는 페르시아인들을 위해 제국을 세워준 키로스다. 그러니 그대는 내 육신을 덮고 있는 이 얼마 안 되는 땅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어떤 위대한 일도 시간과 함께 희미해집니다. 우리의 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소한 질병이나 부상으로도 일상생활은 불편해지고, 나이가 가져오는 신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법칙은 없습니다. 중대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좌절감과 분노를 느끼면서 그때에서야 비로소 아무 일 없는 상태가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녔는지 자각합니다. 하루하루 심심하게 계속되는 것 자체가 기적과 같음에도 인간은 참지 못하고 무언가를 시도하지요. 중요한 점은 그 바탕에 감사가 있어야 하며, 적절한 선에서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탐내는 마음이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비극의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 나이듦은 그런 성찰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자신만의 아집에 사로잡힐 가능성은 더 커진다고 합니다. 작가 이병주 님은 소설 관부 연락선에서 독선의 함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교 신자들은 예외 없이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믿지 않는 것은 뭔가 잘못된 탓이라고. 자기들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일종의 독선 의식이 터무니없는 착각을 정확한 판단인 양 믿게 하는 모양이야.”

 

초 단위로 달라지는 AI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통해 여유 있는 마음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서 남은 삶에 작은 보람과 의미를 남길 수 있는 시간은 어느 때보다 소중합니다.

모든 계절이 저마다의 흔적을 남기듯이 이 창백한 푸른 한 점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서로가 남긴 발자취를 기억하고 가치를 인정할 때 삶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조 창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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