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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경 프랑스에서는 황제와 로마 교황이 재정 수입을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샤를 7세가 그때까지 교황에게 상납하던 수입의 일부를 국왕에게 바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도화된 종교는 세속적인 권력과 재물을 탐내며 영적 경건을 잃어버림으로써 하느님의 백성들은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채 심신 모두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한 신비주의 교파가 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서≫를 펴내면서 자비와 애정을 중심으로 하는 독실한 신앙을 계몽하였고, 이런 개선 덕분에 카톨릭은 다음 세기의 종교개혁에 대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비와 애정’을 되찾자는 호소는 참된 구원의 소박한 실천이었겠지요.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대 역사를 기록한 문헌들을 보면 그 당시의 전쟁은 오늘날에 비해 직접적이었고 거칠고 위험했습니다. 약육강식이라는 이름조차 붙여지기 전, 거의 동물적인 본능만이 지배하는 전투에서 남자들의 희생은 흔한 일이었고 따라서 가정마다 과부와 고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들을 잘 돌보는 것이야말로 그 세계의 가장 중요한 사랑이라는 필요성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합니다.
지금은 ‘사회적 약자’라는 개념으로 더 폭넓은 의미를 담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는 증가했지만, 분배의 불균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현상 또한 그에 비례하여 늘어났습니다. 오늘날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교리를 배우며 영혼의 구원을 외치면서도 정작 생활의 기초가 되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까요?
연말이 되면 곳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빨간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흔드는 벨 소리입니다. 오가며 들으면서도 무감각해진 자신의 모습에 민망해집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임에도 선뜻 기부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합니다. ‘속는 셈 치고 조금이라도 보태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따뜻해지다가도 기부에 관한 온갖 부정적인 뉴스들로 합리화하며 짐짓 외면하게 됩니다. 노숙자들에게 10년째 한 끼 밥을 제공한다는 부부의 신문 기사를 읽으며 감동만 받을 뿐 선뜻 스스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위선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성금을 보내고 순수한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봉사는 스스로의 의지로 참여하는 자발성, 개인이나 가족의 이익을 넘어 사회 전체의 복지 향상을 목표로 하는 공익성, 물질적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보수성, 꾸준히 실천하는 지속성을 요구합니다.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소비와 쾌락을 즐기는 종교인과, 이웃과 나누며 자연을 지키기 위해 절제하는 소박한 비종교인은 누가 더 축복을 받을까요? 일부 엇나간 신도들이 자신의 기도와 욕망을 하느님의 뜻인 양 믿으며 이기적인 행태를 보일 때 혹시나 사회의 타락과 세상의 종말을 종교인이 앞당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때가 있습니다.
봉사는 단순한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이며, 진정한 봉사는 자신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사용한 채 바쁘게 걷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자신의 자유에 충실한 모습이지만 점점 단절되어 가는 세태를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합니다. 자신에게만 몰입하면서 은연중 공동체의 해체를 가져오고 있다고 생각되어서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는 하느님은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을 섬기고 자발적인 감사로 하는 헌신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만약 먼 우주에서 지구를 방문한 여행객이 볼 때 지구인은 개나 고양이 또는 스마트폰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해 봅니다. 사람보다 동물을 더 애지중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금, 과연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도움과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먹이와 보살핌을 받지만 혼자 고립된 채 생활해야 하는 동물들은 과연 행복하기만 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조 창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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