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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요즘 세계적으로도 사랑받는 한국의 드라마이지요.
9화에서 준호의 친구들이 묻습니다.
“너 진짜 괜찮겠냐?”
“잘 생각해, 우리야 그렇다 쳐. 근데 부모님한테도 말할 수 있냐? 그런 사람이랑 사귄다고?”
그러자 준호가 대답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말을 좀 이상하게 한다? 너?”
“너 그거 사랑아냐. 도와주고 싶은 사람 불쌍하게 보는 연민이야.”
이후에는 주먹다짐이 벌어집니다.
저는 이 장면을 끝까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속에서부터 치밀어오는 부글부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제 아내는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부터 큰 난관이었습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등등 차마 입으로 낼 수 없는 수많은 반대를 겪었습니다. 또 결혼 생활 중에도 “너 참 대단하다”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진짜 대단해서 대단하단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 부부를 바라보면서 동등한 남녀의 결합으로 본 것이 아니라 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의 관계로만 바라보았던 것이지요. 특히 연세가 지긋한 분들일수록 더 했습니다. 준호처럼 싸울려면 많이 싸울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것을 바로 편견이라고 합니다. 편견이란 이전의 자기 결정과 경험에 근거하여 내리는 확정적 판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모든 걸 다 ‘아는 체’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사실 우리가 담을 수 있는 지식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경험은 얼마나 될까요? 인간을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위대성을 갖고 있다고 말을 하지만, ‘미립자도 못 담을 만큼’ 허술한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대중매체나 영화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례를 소개받습니다. 그것으로 정말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요. 그러면 극복하지 못한 장애는 다 부정적인 것일까요? 그들은 다 실패한 것일까요?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기에 주류사회로부터 배제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편견으로부터 비롯한 낙인(STIGMA)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생각하기에~’라는 미신적 상상이나 추측이 기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상이 편견을 북돋우고, 낙인을 더 강하게 찍고 마는 것이지요.
가끔 아내가 투털댑니다. “사람들 웃겨, 나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자기가 다 해주는 것처럼 말해.” 그녀의 상처가 느껴져 아무 말도 못하거나 같이 욕해주고 맙니다. 그래요. 장애가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움만 받아야 할 것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사회는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기회를 제약(unequal opportunity)하고 불이익을 주는 행위(different treatment)를 무감각하게 저지르고 맙니다. 장애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문제입니다.
사실 아내는 코로나로 사업이 어려워지기 전까지 나의 가장 든든한 사업 파트너였습니다.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할 때마다 그것을 고쳐줄 수 있는 유일한 파트너였습니다. 코로나 이후로 그녀는 사회복지기관에서 행정 일을 하면서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상사들로부터 ‘정 선생님 없었으면 이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 뻔했어요’라는 감사의 인사를 들을 때마다 부부란 서로 ‘이인삼각(二人三脚)’ 게임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여느 사내처럼 예쁜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눈에 들어온 아내와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인삼각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선 여느 부부처럼 우리도 다투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장애인 가족이라고 해서 더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준호 친구들의 태도처럼 “쫌 그렇잖아~”하는 태도에서 편견과 차별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구별하는(dividing) 마음을 가진 자는 ‘쫌 그런 너’와 ‘그냥 나’를 구분하면서 짐짓 자기가 우월함을 드러내려 합니다. 정작 그 우월함은 남들도 다 인정하는 우월함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수직적 인간관의 위험을 보게 됩니다. 수직적 인간관에서 계급제도와 홀로코스트, 831부대가 탄생하였으니까요.
과거의 사회복지가 시혜적인 가치였다면 현재의 사회복지는 ‘자립적 가치’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인권을 가진 수평적 존재라는 전제 때문이지요. 전제가 아직도 수직적 가치에 머문다면 ‘돌봄 받는 이’와 ‘돌보아주는 이’로 대별되겠지만, 전제를 수평적으로 바꾼다면 인간은 관계성 안에서 양성의 평등, 인간 자체로서의 존중,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편의가 제공된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영우’의 포옹의자가 ‘이준호’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이준호’는 ‘우영우’의 향고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우영우’와 ‘이준호’가 존재합니다. 물론 그들도 지지고 볶고 싸우겠지요. 그래도 그것이 부부의 삶이고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길을 함께 걷는 자-길벗 박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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