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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시작되자마자 추석이네요.
오늘은 추석이었습니다. 어제까지도 밝았던 달이 오늘은 숨어버렸네요.
그러나저러나 기나긴 장마에 모두 별고 없으셨는지요? 이때쯤이면 으레 산소도 갔다 오고 차례도 지냅니다. 저도 부모님 산소에 가서 연도를 드리고 왔습니다. 서로 멀리 사는데다 바쁘다는 핑계로 동생들 얼굴도 이때나 보게 되네요. 그래서 한편으로 이 추석이 씁쓸하기도 합니다.
추석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 때 두 왕녀가 여자들을 거느리고 7월 기망부터 8월까지 베를 짜게 했으며, 보름이 되면 성적에 따라 진 패가 이긴 패에게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보름달 아래에서 회소곡(會蘇曲)을 부르며 놀았는데 이를 ‘가배’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가배'는 큰 가운데라는 뜻이지요. 풍요로운 가을 한자락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고려 때도 추석을 쇠었고, 조선시대에도 조상에게 감사하며 치성을 올렸습니다. 추수의 고마움을 즐겨 마을 놀이도 행해졌었지요.
하지만 이제 우리사회는 농경사회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행해졌던 씨름이나 줄다리기, 그네타기, 소놀이 등은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그 흔적을 어린이들의 가을 운동회에서나 살짝 엿볼 수 있을 뿐이지요. 뿐만 아니라 예전 어린이들의 놀이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땅따먹기, 사방치기, 딱지치기, 말뚝박기 등등..... 수많은 놀이들은 이제 도서관 한 켠에 먼지 앉은 책 속에나 기록되어있을 뿐이지요.
연세 드신 분들에게 아쉬움은 남아있겠지만 당연하고 필연적인 사회 변화일 뿐입니다. 수천 년의 변화 속도보다 이번 반세기의 변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하늘의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그저 장난삼아 비는 척은 합니다. 믿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대한 믿음도, 조상신에 대한 믿음도, 산신, 조왕신, 가신 등에 대한 믿음도 사라졌습니다. 이 속도의 질주가 계속된다면 아직 남아있는 유일신(唯一神)에 대한 믿음도 사라져 종교 기관이 텅텅 비어 박물관이 되거나 문화공간으로 전환될 날도 머지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세 이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겪은 이후 인간의 사상체계는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에서 인본주의(人本主義)와 실존주의(實存主義)로 옮겨왔습니다.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신(神)에 대한 믿음은 도전받고 점차 약화되어 왔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0과 1이라는 디지털이 기계적, 물량적 세계관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대해 논하는 것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 논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정보를 차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컨텐츠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삭막해진 인간 세계에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하늘에 커다란 달이 뜨면 사람들은 시장에 넘쳐나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이동합니다. 더 이상 하늘에, 달에,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지는 않더라도 가족의 의미를 찾고, 풍요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불씨처럼 남아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삶은 0과 1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나’의 근원에대한 갈증은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으니까요.
따라서 ‘나’란 존재의 갈증은 0과 1로는 분석될 성질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 하나를 보더라도 존재냐 비존재냐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 해석되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인식과 쾌락, 긍정과 부정, 단일성과 복합성, 변화와 고착 안에서도 각각 다른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천 년 전의 ‘나’도, 삼국시대의 ‘나’도, 고려시대의 ‘나’도, 조선시대의 ‘나’도, 현재의 ‘나’도 이러한 다양성을 가진 해석 방향 속에서는 일치합니다. 각 시대의 ‘나’와 현시대의 수많은 ‘나’도 결코 기계적인 해석 안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수많은 나는 “다른 문화”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비록 과거와는 다른 방식이라 할지라도 인간 존재 안에서의 ‘다양성’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0여 년 전의 ‘나’가 고민하고 탐구했던 문제는 오늘의 ‘나’에게도 유효함을 가지게 됩니다.
가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예전부터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독서는 현재진행형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고전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시대사상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그 시대나 현시대의 ‘나’와 얽힌 문제는 동일선상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편하게 말하면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하고 거기서 거기라고 할까요? 아님, 그 시대의 ‘나’가 고민했던 문제들이 현시대의 ‘나’에게서도 풀리지 않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요? 그래서 저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인기 없을 만한 유튜브 채널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로서 고민하고 탐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야 내 삶을 더욱 풍족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섭니다.
앞서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하더라도 하늘에 밝은 달이 뜨면 시장은 북적이고 풍요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커진다고 했습니다. 단지 삶의 방식만이 변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과거엔 그랬는데’하는 푸념은 무의미합니다. 다양성을 가진 수많은 ‘나’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빌딩 숲 속이라 하여도 여전히 풍성한 한가위 달은 뜨고, 휘황찬 불빛에 가려도 여전히 별은 그 자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흐릅니다. 저는 법정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대와 풍속이 변하더라도 물은 여전히 흘러갑니다. 어제도 흘렀고, 오늘도 흘러가고 내일도 흘러갈 것입니다. 그래 어떤 이에게는 이 물이 정화수가 될 것이며, 어떤 이에게는 설거지물로 쓰일 것입니다. 어떤 이에겐 커피물이 될 것이며, 어떤 이에겐 변깃물이 될 것입니다. 하늘은 단순한 물을 제공하였지만, 그것을 받아쓰는 우리에겐 다양하게 이용될 수 있습니다. 비록 버려진다하여도 하늘은 단순한 물을 계속 제공할 것입니다. 여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제 시들시들한 화초에 물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잎이 반짝이더군요. ‘나’한테도 그 녀석한테도 물은 ‘생명수’였던 것이지요.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 하늘의 커다란 달도 그런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로부터 과거의 달보다 더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 녀석은 그냥 그렇게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말 것입니다. 풍성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도 그러하겠지요.
그래 나는 우리 집 마당이 참 좋습니다. 달을 별을 크게 볼 수 있으니까요.
길을 함께 걷는 자- 길벗 박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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