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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지하철 안에서, 또는 카페에서 마주 앉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나를 슬프게 한다.’ 안톤 슈낙이 살아 있다면 이런 글을 그의 에세이에 포함시켰을지도 모르겠다. 대화가 실종되어 버렸다.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든 채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대화가 점점 단절되어 가고 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또한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도 없다. 사전은 대화를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 받음, 또는 그 이야기’라고 풀이한다. 보통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그렇다. 대화는 나눔이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것.
그렇다면 주변을 살펴보자. 정말 그런가. 내용은 일단 젖혀두고 형식을 보면 뜻밖에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대화가 어렵다는 사실을 종종 목격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식당에서 한 테이블에 앉은 일단의 사람들이 제각각 손바닥 안의 화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이다. 단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풍경으로 현대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라고만 해야 할까?
우주에서 생명체가 사는 별은 현재까지는 지구가 유일하다. 막막한 공간에 떠 있는 외로운 행성에서 가장 영적인 존재라고 우쭐대는 존재, 인간. 반려동물을 사랑한다며 온갖 아부를 떨어대는 족속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같은 종족끼리 증오하고 죽이는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개체들은 매우 연약하다. 몸은 여러 가지 치명적인 질병의 위협으로 고통받고 온갖 스트레스에 노출된 정신은 종종 변질되기 쉽다. 그러므로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소통은 중요한 통로가 된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 말이 잘 통한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대화는 자연스럽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상대방의 섬세한 배려가 느껴진다. 포근한 봄바람이 볼을 어루만지는 기분이랄까. 거기에는 잘 듣고 공감해주는 부드러움이 있다.
以廳得心(이청득심). 들어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 치세(治世)의 원리이기도 하거니와 관계를 맺는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미덕이자 기술이다. 자기 말만 하는 인간들이 일으키는 불편함 또는 유해성을 보라. 말 한 마디에 천냥 빚 갚는다는 격언이 무색하게 온갖 파렴치한 언어들이 이곳저곳을 떠돈다. 수준 낮은 언행들이 버젓이 행해지는 일상의 악영향으로부터 다음 세대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른이 먼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상식을 지켜야 한다. 상대방의 말을 존중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은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된 파멸을 상징한다. 창조주에게 도전하려는 피조물의 무모한 행위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도록 그들을 갈라놓았다. 같은 말을 써도 소통이 어려운데 수십 수백 개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이후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통역이 된다고 해도 다른 언어는 문화를 달리 하게 만든다.
言爲心聲(언위심성). 말은 마음의 소리다.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는 마음을 치유해주고, 정신을 연대감과 사랑으로 채워준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의미 있는 대화를 얼마나 많이 놓치고 사는지 깨닫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봄의 생명력은 흙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삶이 가장 생동감 있게 발휘되는 모습은 말을 통해 진심이 교류되는 경험을 통해 온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람들이 돌 대신 말을 던질 때 문명은 시작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말을 던질 때 모두가 바라는 평화로운 세상이 가능해진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이해하기 위해 작지만 의미 있는 대화를 시도해보자. 진심이 담긴 말은 관계를 소중하게 만들어준다. 그럴수록 당신 삶의 질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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